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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그림
형상과 발전
대나무는 예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 왔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의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사대부들의 화폭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소동파(蘇東波)와 문동(文同)이었다. 소동파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중성죽론(中成竹論)’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호주죽파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남송때에 이르러 묵죽은 더욱 유행하였고 원대에는 문인사대부들의 저항과 실의의 표현방편으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때 벌써 이행에 의해 죽보(竹譜) 7권이 만들어져 화법이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나무의 생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묵죽화가로서 유명하였다. 원대에는 이 밖에도 조맹부, 오진(五鎭), 찬(瓚) 등의 명가들이 나와 가늘면서 굳센 묵죽화풍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전통이 명대의 하(夏) 등을 통해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되면서 청대로 계승되었다.우리나라의 묵죽화는 고려때부터 중국 송ㆍ원대의 정형화된 묵죽화법의 영향아래 발전하였으며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더욱이 유교를 국시로 삼아 문인들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시대여서 묵죽화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발전했으며 이것을 증빙하는 것으로 화원화가를 뽑을 때 묵죽을 가장 중요시 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묵죽화는 그때그때의 미의식을 대변하여 양식적인 변화를 뚜렷이 보인다. 조선 묵죽화로서 고전적인 전형을 완성한 이정(李霆), 조선후기 개성주의를 표방한 문인화가들, 근대 묵죽의 문을 연 김규진(金圭鎭), 민족의 현실감과 기개를 담은 민영익 (閔泳翊)이나 김진우(金振宇), 그리고 파격의 현대화풍으로 소화한 이응노(李應魯) 등으로 이어진 전통이 그러하다. 이런 변모로 미루어 볼 때 묵죽화는 옛 문인들의 군자적 성정과 기상을 담는 주요 소재였지만, 작가의 개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좋고 지금의 시대감정과 현대적 조형미를 담기에도 손색없는 영역으로 자리잡힌 것이다. 특히 수묵화의 회화적 기량을 높이는 기초로도 그 역할 을 해 왔기에 묵죽화는 그저 단순한 전통 계승이 아닌 현대 화가들에게도 여전히 거쳐야 할 필수라 할 수 있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
대나무의 절개와 지조를 그린 가전체 문학작품이 있다.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 죽존자전(竹尊者傳)과 죽부인전(竹夫人傳)에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죽존자전을 보면, 죽존자는 위수나 소상강 강변에 노닐면서 서리와 눈을 맞아 매우 잘 단련이 되어
기골이 청신하였다. 사군자의 그림 가운데 대나무가 죽존자의 영정(影幀)이다. 그 그림을 세상에서는
보배로이 여긴다. 존자의 덕성이 뛰어남은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대략 열가지 덕이 있다.
나자마자 우뚝 자라고,늙을수록 굳세고, 조리가 굳고, 성품이 맑고 싸늘하며, 소리가 사랑스럽고,
외모가 볼 만하고, 마음이 비어 사물에 잘 대응하고, 절개를 지켜 추위를 잘 참고, 맛이 좋아 사람의
입맛을 기르고, 재질이 좋아 세상에 이로움을 준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이 지은 가전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나무의 맑은 덕성과 의연한
기품을 예찬한 것이다. 이곡의 죽부인전은 다음과 같다. 죽부인의 이름은 빙이고 위빈에 사는 은사
운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창랑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상이 음률을 잘 해득하였으므로 황제가 그를
뽑아서 음악의 일을 다스리게 했다. 우나라때 소(簫: 피리) 역시 그 후손이다. 선대에 문적을 가까이하여
사관이 되고 문인과 친교를 잘 맺고 지냈다.
죽부인은 정숙한 여자로 이웃집 사내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탕한 글을 써서 보냈으나 유혹을 물리치고
거절하여 그를 부끄럽게 하였다. 후에 18세가 많은 송대부(松大夫: 소나무)가 예로서 청혼하니
그가 군자라 하여 부모가 허락 둘은 결혼하였다. 송대부는 선(仙)에 탐닉하여 신선처럼 집을 나가
도를 닦다가 돌로 변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죽부인은 위풍을 노래하며 지내는데 마음이
흔들흔들하여 견딜수가 없었다.
죽부인은 술을 좋아하여 청분산 (靑盆山: 화분)으로 집을 옮겨 살다가 술에 취하여 고갈병을 얻어
고치지 못했다. 병을 얻은 후로 타인을 의지하여 살았고 늙어서도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죽었다.
이에 향리에서 절부(節婦)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절부의 직함도 받았다. 이 작품은 신흥 유학자의
청신한 이념을 표방한 것으로, 당시 타락한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 절부(節婦)가 드물어져 감을 한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열부 죽부인의 절개를 드높여 이를 당시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부각시키려는 작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